살아 있는 관계
Living Relation
May 22, 2022
@남산공원


⭢ Interview


가이아의 향기나는 주스

땅 안에서 밖으로, 아래에서 위를 향하여 온갖 생명체들이 꿈틀거린다. 향을 풍기며 살아나는 움직임. 건조한 가지와 마른 잎에 빛이 깃들고, 온기를 머금은 새잎이 돋아난다. 아주 멋진 흐름, 그리고 순환. 잠든 생명을 깨우는 시간, 잠에서 깬 생명들이 파생시키는 제각각의 움직임. 그리고 봄에 이는 꽃 향기의 이유. 날개달린 자들을 꽃 자신에게로 불러들이기, 초대 그리고 매혹. 이어서 초대받은 자들의 응대, 기꺼이 매혹되기, 부름받은 곳에서 누리기. 어떤 이미지, 움직임, 냄새, 소리를 상상해 보기. 즐거이 분주한 날갯짓, 꽃들 사이로 윙윙거리는 꽃가루 매개자들, 그리고 해마다 그들이 즐기는 달콤한 꽃꿀 주스, 덩달아 신나서 지저귀는 소리들. 그 모든 시간을 누리다 몸에 잔뜩 달라붙은 꽃가루, 이어지는 동작은 그 후 벌어질 또 다른 움직임과 탄생의 예비된 시간을 가득 머금은 채. 스스로가 하는 일을 반쯤 알고 또 반쯤 모른 채, 타고난 대로, 몸이 기억하는 대로, 자신이 속한 계보를 따라 그렇게 움직이기.

당신은 가이아가 누구라 생각해, 무엇이라 생각해? 자연의 어머니, 대지의 여신... 기다란 곱슬머리에 풍만한 가슴을 지닌, 그 뱃속에는 지구를 가득 품고서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신비로운 한 여성의 이미지, 미화된 가이아.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그녀를 오해한 거라면? 언제까지나 온화할 거라는 착각, 아낌없이 또 대가 없이 모든 걸 내어줄 거라는 오산. 어쩌면 가이아와 그녀의 땅이 이미 내린 결정, 거두어들이기. 봄의 풍경을 가득 메우는 윙윙거리는 존재자들이 반쯤 홱 사라진다면, 연이어 그 존재자가 매개하는 꽃들 다수가 수분에 실패해 열매 맺지 못한다면, 따라서 수확 가능한 식량이 필요에 턱없이 부족하다면? 가정형으로 전제한 ‘~다면’이 이미 우리 눈앞에 도래해 있다면. 가이아/대지에서 파생된 생명들이 풍기는 내음은 여전히 당신에게 향기로워? 그 생명들 속에 응충된 향기나는 주스 한 모금을 들이켜 마셨을 때 그건 당신의 기대에 부응하는 달콤한 맛이야? 혹시 그 향기로운 주스가 마지막으로 남은 단 한 잔의 주스는 아니야?

(*기획의 글 제목인 ‘가이아의 향기나는 주스’는 레자 네가레스타니의 저서 『사이클로노피디아』의 한 단락에서 따왔다.)

민백은 평면 작업과 입체 작업을 함께 선보인다. 평면 작업 <Nectar Robber> 는 꽃과 벌 사이에 매개된 관계와 장면을 은유한다. ‘Nectar Robber(꽃꿀 도둑)’는 정상적인 수분 매개 방식이 아닌, 꽃의 옆면에 구멍을 내 꿀만 훔쳐 먹는 벌에게 붙은 별명이다. 기대에서 비껴나가는, 주어진 경로를 이탈해 샛길을 내는 전개 방식은 민백이 지향하는 화면 구성의 한 방법으로, 전시에서 선보이는 평면작 <Before Rose>, <Hot Blind Earth> 에서도 감지된다. 상이한 재료들을 섞어 유기적 형태를 구현하는 평면 작업을 지속해 온 작가는 전시 장소에 맞춰 제작한 입체 작업에서도 이와 유사한 방법을 취한다. 조각나거나 버려진 제각각의 사물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묶이고 붙어 <제본된 가랑이로부터 쓰는 첫 번째 가설>이라는 한 몸을 이룬다. 또한 이 작업은 남산공원 곳곳에 난 구멍을 색색깔의 천으로 메꾼 <푹푹>과 더불어 여성 공통을 아우르는 ‘가이아’라는 존재, 여성 신체에서 주기마다 벌어지는 월경의 감각, 그로부터 파생되는 경험을 (어쩌면)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민백의 작업들을 가이아-대지, 가이아-여성에서 뻗어나온 이야기들로 읽어보기를 제안한다.

양윤화는 퍼포먼스 <소영, 세실, 노노하, 러브 그리고 축복을 위한 의식>을 진행한다. 반투명 가면을 쓴 네 명의 퍼포머은 ‘리프세니토’라는 이름의 도구를 가지고 서로를 향해 비눗방울을 날린다. 비눗방울을 날리는 행위는 서로에게 건네는 축복을 의미하며, 이때 비눗방울이 몸에 닿으면 한 해 동안 행운이 따르는 축복을 받을 수 있다. 네 사람이 서로를 축복하는 의식을 치르는 동안, 우연히 그 곁을 지나다 축복의 비눗방울이 몸에 닿은 사람도 덩달아 축복을 받을 수 있다. 양윤화가 구성한 이 모든 시나리오를 믿고, 비눗방울과의 접촉을 축복으로 받아들일지 말지의 여부는 각자에게 달려 있다. 어쩌면 지금껏 우리가 당연히 여기며 꿀꺽꿀꺽 들이킨 가이아의 향기나는 주스가 사실 축복이었음을 이제서야 누군가는 알았고 아직까지 누군가는 모르는 것처럼, 어쩌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를 그 주스를 지금 마시고 있음을 축복으로 여길지 말지의 여부 또한 각자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 Min Baek